주고 싶은 사랑 받고 싶은 사랑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춘천...
늘 그립고 가고 싶고, 언제나 가도 좋은 곳...
그곳에 가면 언제나 그렇듯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있다.
대학 졸업 후 부천으로 신규 발령을 받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집에서 독립해 자취 생활을 했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생활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 낯설고 외로웠다. 낯선 타지에서 퇴근 후 돌아오면 매일 두어 시간은 엄마에게 전화로 이야기를 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엄마와 나는 각별했다. 어린 시절에 엄마와 함께 목욕탕도 자주 갔다. 다녀올 때 자주 들러서 함께 먹던 칼칼한 칼국수 맛이 아직도 기억에 선연하다. 시장갈 때는 꼭 엄마 손을 잡고 따라 다녔고, 엄마는 자랑스레 나를 아는 분들에게 인사 시키곤 했다. 조금 더 자라 한참 공부할 때면 지극 정성으로 도시락을 챙겨주셨고, 학교 어머니회 활동도 열성적으로 했다. 엄마는 내가 필요할 때면 언제나 곁에 있어 주었다. 공부가 안 되서 속상할 때, 몸이 아플 때, 삶의 무게가 힘에 겨울 때면 언제나 찾아와 기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 덕분에 나는 행복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결심하고 준비할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엄마였다. 결혼 준비하며 엄마와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또 울었다. 옛날처럼 시집간다고 친정에 못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눈물을 많이 흘렸을까? 그때는 잘 알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나는 곧잘 친정에 갔다. 쌀이 없다고 전화하면 쌀을 가지고 와 주셨고, 나물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물으면 나물을 만들어서 와주셨다. 뽀득거리는 느낌이 나지 않는 수건은 어떻게 삶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삶은 수건을 가져다 주셨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불은 어떻게 빨아야 하느냐고 물었던 나에게 춘천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불을 가지고 춘천을 내려 갔다. 이불 빨래 하시랴, 음식 채겨주시랴, 동분서주 하시던 엄마가 갑자기 화를 내셨다. 갑작스런 엄마의 화에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서운함 보다는 미안함이 더 많았다.
주말 부부로 직장생활을 하던 딸이었으니 춘천에 자주 내려가지 못했다.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어 한 두 달에 한번은 가곤 했는데, 갈 때 마다 내가 보는 엄마의 모습은 늘 주방에서 동분서주 하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반갑게 인사 나누고 맛난 것도 사드리고 좋은 곳 구경도 가고 싶었는데, 엄마는 주방에서 음식만 준비했다. 그리고는 올라오는 차 트렁크에 하나 가득 음식을 실어주셨다. 그리고는 일주일은 몸살을 앓곤 했다.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엄마가 주고 싶은 사랑은 그렇게 조금씩 어긋났다.
결혼 5년 만에 아이가 생겼고, 엄마는 아이둘은 책임지고 키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의 이야기를 철썩 같이 믿었던 나였는데, 아이를 오롯이 맡겨둔지 한 달 만에 엄마는 오른쪽 팔에 마비가 왔고, 결국 구획증후군 수술을 했다. 그 수술 이후 오른손은 제대로 쓰시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를 돌봐주시다 그런 사실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엄마는 사랑을 멈출 수 없었나 보다. 불편한 손으로 음식을 하고, 실어 보내고, 힘들어서 짜증도 부렸다가 화도 냈다가, 급기야는 병원에 입원도 하셨다. 지난 김장때는 너무 무리하셔서 응급실로 실려가 피주사를 맞았다.
결혼 후 친정집에 가면 제일 많이 보는 엄마의 모습은 주방에 서있는 뒷모습이었다. 보고 싶은 엄마의 얼굴은 떠나 올 때나 볼 수 있다. 힘에 부쳐 퀭해진 눈, 온갖 양념이 묻어난 앞치마, 어서 눕고 싶은 지친 엄마의 모습, 그 모습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엄마의 사랑을 그만두게 하려고 참 많이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 나는 엄마를 이기지 못했다. 엄마의 주고 싶은 사랑이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이겼다. 날이 갈수록 엄마의 사랑이 아프고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조금씩 커갔고, 욕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엄마가 읽어주는 책을 그대로 듣고 있던 녀석이,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었다. 쉬고 싶어 하는 엄마, 아빠 손을 이끌고 놀이터로 나가고 싶어 했고, 그네를 타자고 하면 철봉을 하고 싶어 했다. 모래만 보면 엄마는 다른 곳으로 아이를 데려가려 했고, 녀석은 모래밭에 맨발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래도 그런 것들은 견딜만 했다. 녀석은 선생님과 친구들이 있는 어린이집보다 엄마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분주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책을 사들이고, 센터 수업을 신청하고, 방문 교사도 들였다. 하루 종일 엄마와 떨어져 있던 녀석이니 하원 후에 엄마와 살 부비고 있고 싶은 게 당연했는데도, 엄마는 교구 수업이 진행되는 방으로 아이를 밀어 넣었다. 몸이 좋지 않아 집에서 쉬고 싶은 녀석을 어린이집에 밀어 넣었고, 출근해서 번 돈으로 예쁜 옷을 사고 책을 샀다. 그렇게 아이가 받고 싶은 사랑과 엄마가 주고 싶은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친정 엄마와 나의 주고 싶은 사랑과 받고 싶은 사랑이 어긋날 때면, 아이와 나에 비추어 생각해 보았다. 결국 사랑은 주고 싶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고 싶은 사랑을 주어야 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아이가 받고 싶어 하는 사랑을 살피게 되었다.
“여은이는 엄마가 어떻게 해 줄 때가 제일 좋아?”
“응, 나 많이 안아주고 뽀뽀해 줄 때.”
“그럼 아빠는 어떻게 해 줄 때가 제일 좋아?”
“나랑 많이 놀아줄 때.”
엄마가 주고 싶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느라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 아이는 더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 자각 이후, 나는 늘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나는 과연 아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주고 있는 엄마인가?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는 엄마는 아니었을까?‘
질문이 깊어질수록 아이 곁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어릴 때 느꼈던 엄마의 따뜻한 품, 행복했던 시간을 내 아이에게도 오롯이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어린시절 만이라도 아이가 원할 때면 언제든 함께 해주는 엄마....
그 생각과 결심으로 시작했던 두 번째 육아휴직,
아이가 원하는 사랑을 주려 노력했지만, 쉽진 않았다.
아이는 지금을 온전히 누리고 싶어 했고, 엄마는 미래를 준비하고 싶어했다.
놀이에 몰입하는 녀석을 재촉해 집으로 데려오는 건 언제나 엄마였다.
책을 즐기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처음의 마음이 조금씩 변해갔다.
책을 많이 읽게 하는 이유도 결국은 성공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여겨지곤 했다.
1학년 겨울 방학 동안 학습 습관을 잡아준다는 명목으로 아이를 힘들게 했다.
2월의 어느 눈오는 날 밤, 놀이터 바닥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결국 나 역시도 아이에게 엄마가 주고 싶은 사랑을 주려했다는 자각이 아팠다.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나에겐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그날 이후 아이에게 주고 싶은 사랑이 꿈틀 거릴 때면 늘 되묻는다.
아이가 원하는 사랑인지를?
나의 친정어머니는 여전히 주고 싶은 사랑을 나에게 주고, 그 사랑이 아픈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엄마의 사랑을 거부하면 엄마가 아프고, 그 사랑을 받으면 내가 아프다.
그 아픔이 나를 자각하게 한다.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을 아이에게 주면 아이가 아프고, 내가 주는 사랑을 거부하면 내가 아프겠구나....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를 아프게 하지는 말아야 겠다.
결국 사랑은,
주고 싶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받고 싶은 사랑을 주는 것임을 잊지 말자.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은 사랑이 엄마와 나의 행복한 일상이듯,
내 아이가 나에게 받고 싶어하는 사랑 또한 엄마와의 행복한 일상임을 기억해야 겠다.
빨래 널러 베란다에 다녀온 사이, 엄마의 컴퓨터 화면에 적어놓은 녀석의 쪽지
엄마 사랑해 뽀뽀x100000000!!!!!!!!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방과후 수업 후 돌아오면 사랑한다고 이야기 해주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어야 겠다.
그게 아이가 원하는 사랑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