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며 사는 삶/기록하고 기억하기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공간,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 곳

이끼장미.. 2021. 4. 12. 07:25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공간, 집에 대하여

 

아빠와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한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고 했다.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엄마를 마음에 품었지만, 의붓 어머니 밑에서 자란 가정환경이 마음이 쓰여 결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마음고생 할 딸아이를 생각했던 외할머니의 마음이었겠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했던 아빠와 그런 아빠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외삼촌은 아빠의 착한 성정을 알았기에 엄마와의 결혼을 지지해 주었다고 했다.

월남전 파병을 결심했던 아빠와 눈물로 보낸 엄마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이어갔다. 그리고 무사히 귀국한 아빠는 엄마와 백년 가약을 맺고 결혼을 했다.

 

엄마, 아빠의 신혼집은 작은 구멍가게 옆에 달린 작은 방이라 했다. 아빠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구멍가게에서 팔 물건을 사왔고, 엄마는 그 물건을 정리해 팔았다고 했다. 꽃다운 엄마, 아빠가 얼마나 쓸고 닦으며 가게를 꾸려 갔을까?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연하다. 덕분에 규모는 작았지만 장사가 잘 되었고, 오빠도 태어나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고 했다. 그러나 셋방살이가 그러하듯, 구멍가게가 잘 되는 것을 시샘한 집주인은 엄마, 아빠가 살던 셋방을 빼달라고 통보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옮겨온 곳은 강원도 춘천시 약사동 산1번지 11반 봉의초등학교,

이곳으로 일터를 옮겨 온 아빠 덕분에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근면 성실하고 성정이 고운 아빠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임을 많이 얻었다고 했다. 교육청 사무직으로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한 아빠가 선택한 일터는 학교였다. 그렇게 아빠는 봉의초등학교의 시설 주무관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한때는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남편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자신을 꿈꾸었던 엄마는 늘 그랬듯, 아빠의 선택을 믿었다. 그렇게 선택한 보금자리에서 내가 태어났다.

 

내가 살았던 사택의 모습을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에 선명하다. 가장 커다란 안방에는 큼지막한 장농이 있었고, 그 옆에는 책상이 있었다. 솜씨가 좋은 아빠는 집안에 필요한 가구들을 뚝딱뚝딱 만들어주 주시곤 했다. 장롱 옆의 공간에 맞추어 서랍도 넉넉해 마음에 쏙 들엇던 그 책상이 나는 참 좋았다. 아빠가 손수 만들어주신, 나무색 페인트를 칠한, 서랍이 여럿 달린 큼지막한 책상, 3이 되어 새집에 새 책상이 들어오기 전까지 나와 함께했던 소중한 공간이자 놀잇감이었다.

 

그 옆 창가에는 엄마의 화장대와 TV가 놓였다. 안방에는 벽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온갖 재마난 보물들이 가득했다. 엄마가 할부로 들여 오빠와 나에게 내어주던 세계명작 동화도 있었고, 심심할 때 먹을 맛난 군것질 거리도 있었다. 오빠와 숨바꼭질할때면 벽장은 언제나 첫 번째 숨기좋은 장소이자, 술래가 되면 가장 먼저 열어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박한 안방에서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내가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아랫목부터 오빠, , 엄마, 아빠 이렇게 네 식구가 쪼로록 누워서 잤다. 엄마 곁을 동생에게 빼앗긴 오빠의 허전함, 윗목에 자리를 펴고 누운 가장의 마음,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젖먹이를 품고 고단하게 잠이 들었을 엄마의 마음, 그 모든 것들이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

 

어린 시절 책상을 놀잇감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책상 밑의 구석진 공간 때문이다. 나는, 책상 아래를 이불로 가려, 그럴듯한 나의 비밀공간으로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함께 놀던 오빠가 학교에 입학하고 엄마, 아빠가 일로 분주할때면 나는, 혼자서 책상 아래에 들어가 놀고는 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이불로 가려진 그곳은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적절한 아늑함과 포근함을 주었다.

 

그곳에서 놀다가 지루해지면 이불을 걷어 내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 가족은 4(엄마, 아빠, 오빠, )이었지만, 4식구만 살게 된 건 내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부터였다. 그전까지는 항상 친척 언니 오빠들로 북적이며 함께 지냈다. 시골(강원도 인제, 현리, 기린 등)에 살던 친척 언니 오빠들이 춘천으로 유학을 나올 때, 춘천에 살고 있던 우리집은 언니, 오빠의 하숙집이 되었다. 어린 시절 항상 북적거리는 언니, 오빠들이 많은 우리 집이 좋았다. 언니 오빠들이 있는 저녁이나, 휴일이 되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엄마 몰래 언니들이 만들어주던 밀가루 튀김 과자와 샌드위치도 맛있었고, 오빠들이 태워주던 목마는 또 어찌나 재미있던지...... 매일 언니 오빠들의 도시락을 싸고, 세탁기도 없이 빨래를 해서 널어야 했던 엄마의 고단함을 알게 된 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책상 밑 공간보다 더 재미있는 곳이 있다는걸 알게 된 것은, ()오빠가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였다. 늘 함께 놀던 오빠가 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자 집에서 혼자 노는 시간이 지루했다. 그럴 때면 우리 가족이 함께 자던 안방 옆의 작은 방에 있는 창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엄마 몰래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냅다 학교 운동장으로 줄행랑을 치곤 했다. 그때부터 신나게 뛰어 놀다보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작은 방에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그릇들이 놓여진 그릇장이 있었고, 한 사람 누울만한 공간이 있었다. 생활하기 좁은 그 공간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척 오빠의 잠자리이기도 했다.

 

안방에서 부엌 쪽으로 나오면 엄마가 가장 많이 생활하는 주방이 있었다. 음식 솜씨가 좋은 엄마는 그 작은 공간에서 맛깔나는 음식을 만드시곤 했다. 3~4명이나 되는 친척 언니 오빠들의 도시락은 물론, 우리 식구의 삼시 세끼를 만들고 먹였다. 그런 돌봄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을 엄마가 설겆이를 할 때면, 나는 업어달라고 생떼를 쓰는 철없는 막내딸이기도 했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아빠가 근무하시는 학교에도 입소문이 자자해, 엄마는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치뤘다. 학교 선생님들의 단체 식사를 준비하거나, 운동부 학생들이 합숙 훈련을 할 때에 엄마는 그 많은 음식을 준비하시곤 했다.

 

사택에서 나와 왼쪽으로 돌아서면 커다란 가마솥 두 개가 얹혀진 아궁이가 있는 공간이 있었다. 엄마는 그곳 가마에서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가마솥 밥을 하는 날에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 것도 즐거운 놀이가 되기도 했다.

 

생떼를 쓰며 울면, 친척 언니, 오빠들은 언니, 오빠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곤 했다. 그 방에는 평소에 구경해보지 못한 재미난 것들이 많았다. 언니, 오빠들의 책가방, 학용품, 그리고 공부하는 책도 신기하기만 했다. 나도 나중에 학교에 가게 되면 열심히 공부해야지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하루는 엄마의 고함 소리에 잠에서 깬 적이 있었다. 부엌 옆의 친척 오빠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주말에 낚시 가려고 사온 떡밥과 지렁이병을 고이 모셔두고 잠이 들었는데, 지렁이가 담긴 병속의 지렁이가 밤새 탈출해, 방안을 기어다니는 중대 사건이었다. 동물이나 곤충을 무서워 하는 나는 울기 시작했고, 엄마는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친척 오빠들은 안절부절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지렁이를 잡느라 신이 났다. 그 방에 있던 냉장고 속까지 싹 뒤져서 지렁이를 찾아내려 노력했지만, 그 지렁이들을 다 찾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집 앞에는 커다란 화단이 있었는데, 화단에 아빠가 정성들여 가꾼 꽃들이 가득했다. 그 중 기억나는 건 달달한 꿀을 빨아먹고는 했던 사루비아, 맨드라미, 채송화, 봉숭아가 가득했는데,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사루비아였다. 빨간 사루비아는 예쁘기도 했지만 달달한 꿀을 빨아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놀다가 엄마, 아빠 몰래 따먹는 사루비아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화단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면 학교 정문이 있었다. 정문 옆에는 커다란 버드나무와 펌프가 있었다. 버드나무잎을 따서 풀피리를 불기도 하고, 마중물 한바가지 붓고 신나게 펌프질을 하면, 금세 시원한 물놀이장으로 변신하는 그곳을 나는 참 좋아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가면 놀이터가 있었다. 모래밭에 있던 미끄럼틀, 하늘위로 오를 수 있는 정글짐,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네까지...바깥에서의 놀이는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놀이도 끝은 있으니, 5시에 울려퍼지는 애국가였다. 애국가 울리면 집으로 돌아올 시간, 놀이밥을 끝내야 하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깨끗이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목욕하고 나면 오빠와 나는 안방에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는데, 아직 놀고 있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때에는 수목 이름 맞추기 대회가 있었다. 아빠와 함께 손잡고 학교 구석구석을 다니며 꽃과 나무의 이름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 배꼽 옆에 종기가 나서 커다란 고약을 붙여 놓았는데도 아팠다. 그래도 아빠와 단둘이 손잡고 다니며 나무와 식물들 이름을 배우는 시간이 좋았다. 덕분에 수목 이름 맞추기 대회에서 당당히 입상도 했고.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숙제가 있는 날에는 일하는 엄마 옆에서 숙제를 하곤 했다. 엄마가 장돗대 옆에 있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걷어 갤 때 그 옆의 평상에 앉아 숙제를 했다. 선생님이 나눠주신 종이 위에 깍두기 칸을 그리고 글씨를 따라써야 했는데, 삐뚤빼뚤 자로 선을 긋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엄마가 해주는 칭찬에 어려운줄도 모르고 열심히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해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집에서 행복했다. 나를 사랑해줄 어른들이 많다는 것도, 곳곳에 넝쿨타고 오른 등나누와 아카시아 나무가 울창한 학교의 수목이 많이 있다는 것도, 놀이터에서 교사 뒤편의 소꿉놀이를 즐기던 비밀의 공간까지...... 집 밖 곳곳에 숨을 데가 많다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보낸, 즐거운 기억이 가득한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였다. 내가 나고 자란 사택 자리를 허물어 내고 병설 유치원이 세워진다고 했다.

갑자기 살던 곳을 잃게 된 부모님의 막막함을 당시에는 잘 알지 못했다. 그저 학교에 다녀오면 따뜻하게 반겨주던 엄마가 집에 없다는 것으로 어렴풋이 가늠해 볼 뿐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일자리를 구했다고 했다. 엄마가 일자리를 구했다는 것은, 예전처럼 학교에 다녀와도 반갑게 맞아줄 따뜻한 엄마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텅빈 집안에 혼자 남겨진 나는 엄마가 올 때까지 엉엉 울었다. 엄마가 퇴근해 오기 전까지, 학교에 갔던 언니 오빠들이 오기전까지 나는 내내 울었다. 그러나 나의 눈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1~2주 후에 엄마는 다시 돌아왔고, 다행히 새로 이사갈 집도 정해졌으니까......

 

당시의 나는 엄마가 다시 내 곁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그 후로도 엄마는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내게 엄마가 필요할 때 언제나 그 너른 품을 내어주었다.

 

그러나 내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 난 이제 괜찮아. 엄마가 그동안 충분히 사랑해 주었으니까. 그러니 내 걱정 하지 말고,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 엄마와 함께하던 모든 시간들이 그립기는 해도, 금세 나아질거야. 나도 점점 성장할거고. 그러니, 엄마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그러나 나의 엄마는 11살 내 곁에 남았다. 그리고 47이 된 지금까지도 내곁에 남아 있다. 이제 47이 된 나는, 나만 바라보고 살게 해서 미안한 마음으로 엄마를 본다. 그때 내가 엄마를 떠나보낼 용기를 조금 더 내었더라면, 엄마는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후회하면서......

 

내가 기억하는 나의 최초의 공간이 허물어진 자리에 멋진 병설 유치원이 세워졌다. 우리 4식구가 쪼로록 누워 살 부비며 잠을 자던 안방이 있던 자리에는 예쁜 화단이 만들어졌고. 내가 나고 자란 공간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키우는 공간이 된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나고 자란 공간이 학교였으니 내가 교사가 되어야겠다 꿈을 키운 이유도 어쩌면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