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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때마다 투명해진다 / 나의 싸움목록 0순위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1. 21. 23:39
과제 2. 주관적 글쓰기( 나의 싸움목록 0순위 )
한 주간 읽은 책에서 질문 한가지를 생각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가기
어린 시절 명절이면 큰댁에 모여 놀았던 기억이 난다. 나의 큰댁은 강원도 인제, 아주 시골이었다. 큰댁, 작은댁, 우리 가족까지 4형제의 대가족들이 모이면 커다란 상 2개로도 모자랄 만큼 아주 많은 식구들이 모였다. 잠 잘 곳이 부족해 여러 명이 한 이불 옹기종기 모여 자던 시절이었는데, 그래도 즐거웠고 신났던 기억이 난다. 큰댁 앞에 있는 논과 밭에서 잠자리, 메뚜기 잡으며 놀았고, 길 따라 내려가면 강에서 물놀이도 곧잘 했다.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은 논, 밭에서 썰매도 타고, 마당에서 떡 매 쳐서 만들어 먹던 떡도 생각난다.
그렇게 즐거운 놀이가 가득했던 큰 댁을, 어느 순간이 되면서 나는 가지 않았다.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밤에 자다 깬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우리 가문 족보에 여자 이름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제사나 차례 지낼 때 큰아빠, 아빠, 작은아빠들과 아들들만 절을 했고, 큰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엄마와 딸들은 뒤에 주루룩 서 있었다. 어린 내 눈에는 너무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나는 야무지게 따져 묻기 시작했다. ‘왜 여자는 절을 안 하는 거냐? 족보에는 왜 이름이 없는 거냐? 그럴 거면 뭐 하러 큰집에 내가 가야 하는 거냐?’ 질문이 많아진 내가 납득할만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명절이 되어도 큰집에 가지 않았다. 혼자서 집에 남아 공부를 했다. 충돌이 일어날 상황을 회피했다. 내 마음속에 분노가 싹 트기 시작했던 때가 아마 그즈음 이었나보다. 다행인 것은 학교에서는 여자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던 경험은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면 그에 상응하는 인정과 지지를 받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어린 시절부터 꿈꿔 왔던 교사가 되었다. 그리 넉넉지 않은 살림이었기에 국립 서울대가 아니라면 서울로 지원하기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국립 강원대로 진학을 했다. 장학금 받고 입학했고, 학교 다니는 내내 수석으로 장학금 받고 다니고,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 그 어렵다던 교사임용고시도 단번에 합격해, 온 나라가 어려움으로 시끄럽던 1998년 IMF 시절, 나는 당당히 교사가 되었다. 교사가 된 이후 3년 후엔 1급 정교사 자격 연수를 방학 내내 받고 성적이 매겨진다. 당시 1급 정교사 자격 연수의 점수는 인사고가에 반영되는 중요한 점수였기에 경쟁이 치열했다. 그 치열한 연수에서 나는 100여명이 넘는 연수생들 중에서 명문대 출신의 다른 교사들을 제치고 1등을 했다. 그렇게 나는 승승장구 했다. 노력하면 인정받던 꽃같은 시절이었다.
결혼 전 학교에서 근무할 때 어려움은 없었다. 되고 싶었던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도 예뻤고, 돌봐야 할 식구도 없었던 나는 내 시간을 온전히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다.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고 그 댓가로 돈도 벌었다. 행복했다.
그런 내가 다시 ‘여자의 본분’에 억압받는다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청혼 받았지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면 명절에 남자 집에 먼저 가는 것이 싫었다. 신랑은 결혼 후에 우리 집에 먼저 간다는 약속으로 나를 설득했다. 결국 나는 결혼을 허락했다. 그 후로도 결혼 준비하면서 참 많이 울었다. 예단은 왜 남자 집에 보내야 하는지? 폐백은 왜 남자 집에만 하는 건지? 질문은 많았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해결해 주지 않았다.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을 모두 마음에 묻고 결혼을 했고, 결혼 후 첫 명절이 되었다. 첫 명절이니 친척집에 인사드리러 가야 한다며 나를 끌고 이리저리 인사시켜야 한다며 이리저리 끌고 다닌 후에야 나는 친정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어둑어둑해진 시간이었지만 목 빠지게 기다리던 나의 엄마, 아빠의 빨간 눈시울을 보고는 눈물이 났다. 다음 명절 즈음 신랑에게 이야기 했더니, 자기는 상관없지만 엄마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는 신랑이 이야기를 꺼내니 시어머니와 신랑이 나를 앞에 두고 다투었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자의 본분’에 대한 억압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아이가 태어났다. 결혼 5년 만에 얻은 귀한 아이였다. 이름을 짓는데 성이 문제였다. 왜 아이 성은 아빠를 따라야 하는냐? 따져 물었다. 이번에도 관계유지를 위해 내가 견디어야 했다.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하나 둘 쌓여만 갔다.
임신 했을 때 아이 둘 키워 줄테니 걱정 말라던 친정엄마는 아이 돌봐주신지 석 달 만에 팔이 탈이 났고, 결국 수술을 하시게 되었다. 그 후 시어머니께서 1년 정도 도와주시다가 암 수술을 받게 되셨다. 아이가 온전히 맡겨지는 상황이 나에겐 두려움 이었다. 아이 낳기 전 나는 직장에서 유능하고 사랑 넘치는 교사로 헌신했다. 그러나 아이 엄마가 된 이후로는 제약이 많았다. 시간적 제약이 없었다면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전공이 아닌 교과를 가르쳐야 하는 중학교보다는 고등학교 근무를 하고 싶었고, 아이들이 좋았던 나는 담임도 맡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엄마’로서 모성을 강요받는 느낌이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동안 쌓아왔던 나의 입지가 흔들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아이를 육아도우미에게 맡기자고 신랑을 설득했다. 직장생활하다 나타날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도움을 청할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육아 전문가가 필요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내 의견을 들어주었던 그였는데, 육아에서만은 확고했다. 내가 안하면 자기가 육아휴직을 하겠다며, 내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데리고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씻기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서야 나는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관계를 위해 자신이 내놓은 신랑을 보고서야, 나는 자발적 모성을 선택했다.
그 후 1년의 육아 휴직 동안 나는 아이와 행복하고도 두려웠다. 예쁜 아이 물고 빨고 함께해줄 수 있어 행복했고, 다시 돌아갈 직장에서의 입지 때문에 두려웠다. 행복과 두려움에 뒤섞인 나는 결국 1년 만에 복직을 했다. 복직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육아전쟁을 나는 온몸으로 경험했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잘해내고 싶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신랑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도왔지만, 육아의 책임은 고스란히 엄마 차지였다. 새벽녘이면 출근 준비하느라 머리감고 있는 욕실 앞에 와서 꺼이 꺼이 울고 있는 아이, 아빠가 안아주려 뒤에 와 있어도 엄마만 찾는 아이... 아이도 울고, 머리 감던 엄마도 울고, 뒤에 있던 아빠도 울고, 우린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복직 후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힘들었다. 지키고 싶은 나 자신과 지켜주고 싶은 아이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고민했다. 두 가지를 함께 지켜나가기에는 언제나 충돌이 있었다. 그 충돌 앞에 선택의 상황이 반복되면서, 나는 삶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순간 아이를 포기하고 나 자신의 존재를 위해 노력한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럴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 존재를 포기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그것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엄마에게 제 삶을 온전히 의지하는 녀석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공부했다. 아이의 어린시절의 엄마는 아빠도 조부모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고서야 나는 엄마로서의 나를 인정했다. 엄마인 나를 인정하고 나니, 그동안 외롭게했던 아이에게 미안했다. 그 미안함이 어찌나 후회스러웠던지....조금 늦었지만 나는 다시 아이곁으로 돌아갔고, 어린시절 내주지 못했던 엄마의 시간을 고스란히 내어 주었다. 내어준 시간의 몇갑절에 해당되는 행복을 누렸다. 아이와 함께한 지난 4년의 시간은 상처뿐이라 생각했던 여자로서의 나에게 엄마로서의 행복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게 해준 귀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여자여서 아팠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내가 싫었다. 나는 오빠보다, 신랑보다 공부도 더 잘했고, 더 빨리 안정적 직업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여자의 본분’이 불편했다.
내가 가장 참기 힘든 분노는 친정엄마의 아들선호 사상이었다.
나는 오빠보다 공부도 잘했고, 부모님께도 더 잘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용돈도 드리고, 병원 예약 및 치료 문제도 내가 거의 다 해결했다. 집안의 중요한 대소사도 시시콜콜히 나에게 상의하는 엄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늘 ‘아들’이 우선이었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랬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참고 참던 내가 2016년 여름 결국은 터뜨렸다.
아마 초복에 모여 삼계탕을 먹던 때 였나 보다. 전복을 넣은 삼계탕이었는데, 전복 갯수가 모자란 모양이었다. 결국 엄마와 내 삼계탕 그릇의 전복을 빼내어 아빠, 오빠, 사위, 새언니에게 주었다. 사실 전복이 먹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아니, 그동안 쌓여진 분노가 터져 버렸다. 그 뒤로 엄마와 치열하게 싸우고 사과를 받았다. 그 끝에 친정엄마가 또 하는 말이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허리가 좋지 않은 나와 아이가 안 생기는 오빠를 위해 홍삼을 사 놓았는데, 내 것보다 오빠 것이 더 좋은 거라는 사실....차라리 말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텐데, 굳이 나에게 이야기 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전화를 주고받는 친정엄마와 나였는데, 나는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몇 차례 전화를 하던 엄마도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4개월여를 단절된 채 지냈다. 그 시간동안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느끼는 분노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분노의 바닥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참 오랜 시간 생각했다.
나는 전복도 홍삼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여자’이기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직장에서 받았던 설움, 사회적으로 억압받았던 감정, 그 모든 것들을 아무 조건 없이 위로받고 싶었던 사람이 '엄마'였다. 그 엄마가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말과 행동들에 상처 받았다. 상처가 아프다고 성내던 나에게 엄마도 마음에 담아놓은 말들을 꺼내 놓았다.
너를 똑같이 공부 시키고 키웠지만, 너도 시집가고 나니 별수 없지 않냐?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는 명절에 한번씩 번갈아가며 먼저 와라.
시댁 가서는 큰소리 한번 못 치면서 왜 엄마에게만 그렇게 큰소리치냐
그렇게 잘난 척 큰소리치면서 결국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 않았냐
세상을 바꾸지 못할 거면 그냥 조용히 살아라.......
엄마가 미웠다. 내가 가장 사랑받고 싶은 사람에게 가장 아픈 말을 들었다.
그 아픔을 마음에 그대로 두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친정엄마는 여자인 당신의 삶에 왜 분노를 느끼지 않을까? 여자인 당신보다 남자인 남편과 아들을 위한 삶을 살까? 더 살갑고 부모에게 잘하는 딸보다 아들을 더 잘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족보에 이름 파가며 지켜내고 싶은 가문과 대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렇게 지켜낸 가문이 무슨 의미일까? 이런 가부장적 구조를 만들고 구조화 시키고 견고하게 만든 건 누구일까? 그 체제에 순응하고 살도록 하기 위해 여자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차단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교육의 기회를 받고 자란 나와 내 또래의 여자들 중 나는 왜 이 상황에 분노하고, 순응하는 다른 사람들은 왜 그럴까? 왜 나에게 유독 아프게 다가올까? 나를 통해 세상에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생각이 깊어지니 생각보다 견고하고 굳어진 가부장적 체제 안에서 약한 우리들이 서로를 상처주며 싸우고 있었구나 싶었다. 내가 싸워야 하는 것은 더 크고 거대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여자의 본분’으로 억압하려는 세상에 분노하는 여자이다. 그러나 여자로서의 존재를 지켜내는 싸움보다 '엄마‘로서의 촉이 더 발달된 사람이다. 그것이 가부장적 문화의 소산이든 아니든, 내 몸을 빌어 태어난 내 아이를 온전히 사랑해주고 싶다.
아이는 상처뿐이라 생각했던 ‘여자로서의 내 삶’이 행복했음을 알게 해준 고마운 존재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절대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아이 덕분에 엄마로서의 삶을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아모르 파티’
싸움 끝에 내가 품은 니체의 말이다.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은 운명이다. 그동안의 나는 이 운명을 거부하며 살았다.
불편한 순간을 회피했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노를 켜켜이 쌓아 두었다. 그러던 어느날 터져버린 분노에 절망했다. 싸움에 이기지 못한 약하디 약한 내가 가여웠다. 그런데 나보다 더 약한 어린것이 내 다리를 붙잡고 울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는데 너무 미안하고 아팠다. 내가 세상 빛 보게 한 내 아이를 위해 노력했다. 나보다 더 약한 녀석을 돌보며 여자인 내 삶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나는, 내 운명을 사랑하는 내가 되고 싶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바꿀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쓰는 내가 되고 싶다.
나는 지금 여자여서 불행한 나를 안고 엄마로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런 내가 여자로서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때는 싸움이 끝나겠지....
내 삶 다하기 전에는 길고 긴 그 싸움이 끝나기를 소망한다.
행복한 나로 죽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내 몫의 삶을 살고, 아픔을 기록하며, 걸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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