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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먹는 것의 의미는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1. 23. 23:51
과제 6. 주관적 글쓰기( 내 몸 내가 지키는 기적의 밥상~~ )
한 주간 읽은 책에서 질문 한가지를 생각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가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급속한 성장이 시작되었다. 예쁜 옷도 입고 싶고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체구가 컸던 나는 러블리한 아동복을 입을 수 없었다. 6학년이 되면서는 몸무게도 부쩍 늘면서 나는 친구들보다 뚱뚱한 체구가 되었다.
신체적 변화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민감한 사춘기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이성친구도 생겼고 그 친구와 짝꿍도 하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으니, 같은반 남자 친구가 뚱뚱하다며 놀려댔다. 무척 활발하고 명랑하며, 자신감 넘치고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했었던 나였는데, 그 놀임이 나에겐 커다란 상처로 남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인 **여중에 입학했다. 여중에서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 받았던 경험은 없었다. 중학교 3년 내내 반장을 했고, 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할 정도로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생활했다. 누구보다 자유롭게 성장했고 꿈을 키워 나갔던 시절이었다. 한참 성장할 중학교 시절이었으니 신체적 발육이 더욱 남달랐던 시절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진학할 당시, 내가 살던 춘천의 고입제도가 평준화로 바뀌었다. 나는 춘천 유일의 남녀공학이자 합반 운영을 하는 신설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여학생들끼리만 생활했던 여중 때와 달리 남녀 합반의 고등학교 생활은 긴장감 넘쳤다.
40명 남짓한 친구들 사이에서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고가며 가슴앓이를 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었다. 당시의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남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여자 친구들은 나보다 예쁘거나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보다 날씬한 체구였다.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신체적 약점을 가지고 놀리진 않았지만 뚱뚱한 체구는 자신감을 떨어뜨리게 했다.
그렇게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나는 뚱뚱한 나로 ‘놀림 받는 느낌으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의 뚱뚱한 체구는 나의 식생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나는 학교 다녀와 저녁을 먹고 나서도 배가 고팠다. 중학교 때 가장 좋아했던 간식은 하교 길에 학교 앞 분식점에서 사먹던 라면땅과 쥐포튀김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며 먹던 간식이 어찌나 맛나던지, 지금도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시절엔 야자 마치고 집에 돌아와 허기진 배로 잠들지 못했다. 식구들이 잠들어 고요한 그때에 남몰래 끓여먹던 꼬들꼬들한 라면이 어찌나 맛나던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야밤에 졸음을 막아주던 것은 달달한 밀크커피에 찍어먹는 에이스였다. 밀가루, 튀김, 짠 음식들이 주 간식메뉴였다.
신체는 점점 뚱뚱해지고, 마음은 점점 예민해지던 어느 날, 고2 체육시간이었다.
체육시간 시작 전에 준비운동으로 운동장을 2바퀴 달리고 나니 숨이 가파 왔다. 잠시 스탠드에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운동장 2바퀴도 겨우 달리는 내가, 뚱뚱하다고 놀림 받고 모멸감을 느끼고 있는 내가, 그러면서도 아무런 변화도 하려하지 않는 내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날부터 나는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아침, 점심은 꼬박 먹고, 저녁만 금식을 했다. 주문 도시락을 먹겠다고 받았던 저녁비는 꼬박꼬박 모아서 통장에 저금을 했다. 그리고는 공부에 몰입했다. 점심 도시락을 3교시 후 쉬는 시간에 먹고, 4교시 후 있는 점심시간 1시간과 저녁시간 1시간은 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다.
그렇게 하니 1주일에 1kg이 빠지고, 성적은 올랐다. 살이 빠지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졌고, 식사시간에 공부하니 성적이 오르니 1석 2조의 효과였다. 그렇게 나의 고2 시절이 끝났다. 1주일에 1Kg씩 빠졌으니 교복치마와 마이를 2번이나 수선할 정도로 신체적 변화가 컸고, 성적도 많이 올랐다. 살이 빠지고 성적이 오르니 나를 대하는 (이성) 친구들의 태도가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뚱뚱한 과거를 모르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를 처음 만나는 친구들, 선후배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나는 바보같이 그 이유를 가녀린 나의 체구와 좋은 성적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 몸을 더욱 혹사시켰고, 나는 더 야위어 갔다. 대학교 2학년이 되면서 내 식생활은 엉망이 되어갔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엄마가 차려주신 건강한 식단으로 아침, 점심을 먹고 저녁만 금식을 해서 체중감량을 했지만, 대학교 때는 그마저도 금식을 했다. 하루 한 끼 조차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고, 과일이나 과자 같은 것들로 끼니를 때웠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몸무게(48kg)가 되었지만, 대신 수많은 병들을 얻었다. 과민성 대장증후군, 위염, 방광염을 달고 살았고, 섭식장애 증상도 나타났다. 신경이 더욱 예민해졌고, 큰 시험이 있거나 학과 행사가 있는 날에는 늘 다리 근육이 뭉치고 아팠다.
대학 3학년 기말고사 기간에 전공시험 전날에도 삼시 세끼를 금식하고 저녁에 수박만 조금 먹고 공부를 했다. 극도의 신경과민 상태의 나는 결국 다음날 강의실로 가지 못하고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렇게 건강 적신호를 수차례 겪으면서도 나는 ‘다이어트’를 포기하지 못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면서 신경과민은 더해졌지만 나는 여전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음식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내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터질 것만 같았고, 사람들이 나를 놀려대고 멀리 떠나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극도로 음식을 거부하다가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먹기도 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그렇게 건강한 식습관이 무너진 채로 나는 임용고시 합격이후 사회생활과 함께 처음으로 자취를 시작했다. 자취 시작 이후 내 식생활은 더 엉망이 되었다. 나에게 먹는 행위는 비만으로 이어지고 그러면 타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강박적 관념이 강했다. 그 생각들은 음식에 대한 거부, 폭식, 구토, 죄책감으로 나타났다. 날씬한 몸매는 유지되었지만 내 몸과 마음은 병들어 갔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했고, 신랑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부터 만났던 신랑이니 나의 불규칙한 식습관과 섭식장애에 대해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나의 섭식장애 증상을 심각하게 보았고, 병원 치료를 권유했다. 나는 용기 내어 병원을 찾았고, 의사와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일주일치 약을 처방받았다. 병원을 다녀온 나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섭식장애를 조금씩 극복하려 노력했다. 변하고 싶었지만 변하지 못하는 내가 싫었다.
그런 나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쁘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내 몸 안에 아이가 있다고 생각하니 먹는 것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야 했다. 배가 고프니 아무것이나 먹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위해 좋은 것들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임신 기간 동안은 누구보다 철저히 가려서 먹었다. <내 몸 내가 고치는 기적의 밥상>에 나오는 식단처럼 나물 위주의 식사를 했고, 과일, 채소, 견과류를 즐겼다. 조엘 펄먼 박사는 유제품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야기 했지만 하루에 우유 1잔씩은 꼬박 마셨다. 내가 살면서 그때처럼 철저하게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서 먹었던 적은 없을 정도였다. 그 좋아하던 커피도 임신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났다. 다행히 녀석은 건강했고, 피부도 고왔고 더할 나위 없었다. 무럭무럭 커가는 녀석이 이유식을 하고, 밥을 먹기 시작하면서 먹거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아이에게 좋은 식습관을 형성해 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내 식습관은 여전히 불규칙적이었다.
그러던 내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난 것은 30대 후반이 되면서 부터였다. 조금씩 아팠던 허리 통증이 조금씩 심해지면서 다리도 져려 왔고, 저녁이면 다리가 퉁퉁 붓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누웠다가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손으로 짚어야 가능할 정도였다. 병원에 가서 디스크와 협착증 진단을 받은 나는, 운동부족이라 여기고 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나 운동만으로 몸이 나아질리 만무했다. 운동을 다니면서 먹거리에 관심을 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동안 즐겨 먹었던 과자, 아이스크림, 사탕 및 가공 식품들속의 식품첨가물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먹거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친환경 먹거리를 찾기 시작했고, 조금씩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매일 해독주스 1잔(양배추, 브로컬리, 토마토, 당근, 삶은 콩 1스푼, 견과류 1스푼)을 아침 운동 후에 먹고, 점심에는 가볍게 과일을 조금 먹고, 저녁은 온가족이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다가 점심약속이 생기는 날에는 하루 2끼를 밥으로 채우게 되는데, 그런 날은 속이 더부룩한 편이다. 몸이 편하려면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은 저녁식사를 줄여야 하는데 요즘은 어찌나 입맛이 도는지 자꾸만 먹게 된다. 그래서 휴직 이후 몸무게가 제법 늘었다.
이번 과제 도서인 < 내 몸 내가 고치는 기적의 밥상>을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먹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를 임신 했을 때나 내 몸이 아플 때는 건강을 위해 제대로 잘 먹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내 몸이 괜찮아지면 먹는 것에 여전히 거부감이 든다. 그 거부감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며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인정의 욕구’를 발견한다.
내 신체 변화에 따라 달라졌던 타인의 태도가 내 안의 상처로 고스란히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그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정서적 상처를 치유하느라 내 몸이 혹사당하면서 몸 이곳저곳에도 상처가 남았다. 과민성 위염, 대장염, 섭식장애, 디스크, 협착증까지.... 비만에 의한 질병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건강하지 못한 나의 몸과 마음이 내 행복을 앗아가는 느낌이 든다.
디스크를 앓고 나서부터는 아이와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었다. 스케이트, 스키는 꿈도 꿀 수 없고, 눈썰매, 놀이기구를 탈 때도 조심해야 한다. 아이 한번 안거나 업어주려면 복대를 해야 한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허리가 너무 아플 때는 뚱뚱해도 좋으니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더 열심히, 잘 먹으려고 노력중이다. 하지만 요리 솜씨가 부족하니 자꾸만 가공식품에 눈과 손이 가고, 요리법이 용이한 고기와 생선을 자주 식탁에 올렸다.
그런 나에게 이번 책은 고마운 지식을 주었다.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가장 강력한 자신인 건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9월 1일부터 6주 동안 나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해볼 참이다. 샐러드를 주식으로 하되, 채소, 과일, 콩 위주의 식사를 통해 내 몸이 어떻게 변해갈지 기대가 된다. 그 6주 동안의 변화가 행복한 나로 살아가는 첫 걸음이 되어주길 바란다.
매 끼니마다 수북한 샐러드 1접시, 채소와 과일은 제한 없이 듬뿍 먹기, 해독주스 갈 때 콩, 견과류 1스푼씩 넣기, 이 책을 통해 변화된 우리집 식탁의 모습이다.
질병을 부르는 음식으로 몸을 망가뜨리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조엘 펄먼의 조언을 가슴깊이 새기고, 더 건강해지기 위해 제대로, 잘 먹고 싶다. 그래서 나에게 먹는 것의 의미가 기쁨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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