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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만 철썩 같이 믿었던 철부지 엄마엄마가 된다는 것/엄마가 되어가는 시간 2020. 11. 17. 04:23
서른이 되기 한 달 전 십년을 연애한 그와 결혼을 했다. 함께 혼수를 준비한 어느 날 자취방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엄마가 키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고 직장일 열심히 해.”
늘 그래왔듯 나는 엄마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결혼 후 주말부부로 지냈던 우리는 만 3년이 되어서야 합가를 했다. 적지 않은 나이이기도 했고, 합가도 했으니 아이가 하나 생기면 좋겠다 싶었다. 그 후 5달 정도 후 우리는 임신 소식을 들었다. 원하는 때에 순조롭게 우리에게 와준 고마운 아이에게 ‘순순이’란 태명도 붙여 주었다. 기다렸던 아이라 기쁨도 컸다. 양가 어른들도 첫 손주 소식에 함께 기뻐하셨고, 그렇게 우리는 축복의 시간을 보냈다. 아직 엄마가 된다는 것이 잘 실감 나지 않았지만, 새로운 생명을 내 안에서 키워낸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정성을 다했다. 내가 먹는 음식을 아이가 먹게 된다고 생각하니 나쁜 음식은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하루 2~3잔은 족히 마셨던 커피도 먹고 싶지 않았고, 밀가루나 고기도 즐기지 않았다. 임신전의 나는 걸핏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특히 탄수화물을 거의 먹지 않았는데, 임신 기간 내내 비빔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신기했다.
태교도 열심히 했다. 아이를 기다리며 바느질로 배넷 저고리와 딸랑이 인형도 만들고, 좋은 음악도 듣고, 좋은 책도 듬뿍 읽었다. 당시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도 아가가 들으니 이쁜 말만 해야 한다고 서로들 조심을 했다. 겨울방학 즈음부터는 숨이 가파지고 8자 걸음을 걷는 내가 느껴져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막달에는 정말 숨이 턱까지 차올랐데, 아이 낳기 1~2주 전부터는 꼼짝 달싹 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던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틈틈이 산책하며 아이를 기다렸다. 그래서일까? 늦어질지 모른다던 초산인데도 녀석은 예정일보다도 2주나 일찍 세상 밖으로 나왔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배가 푸욱 꺼져버리던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를 품에 안는 기쁨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 10달을 함께했던 녀석이었는데 이제는 떨어져 지내야하는 사실이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나보다. 출산 이후 나의 눈물 바람이 시작되었다.
아이 낳으면 키워주신다고 철썩 같이 약속했던 친정엄마 이야기대로 퇴원 후 친정인 춘천으로 갔다. 출산 이후 친정 부모님 도움을 받으며 아이를 키웠고, 주말이면 남편이 내려왔다.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나도, 키운지 오랜 시간이 지난 엄마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신생아 목욕 씻기기, 젖몸살, 모유 수유까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고, 친정 엄마는 넘쳐나는 빨래와 삼시 세끼 식사를 차리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하셨다. 결국 산후도우미를 구해 도움을 받으며 조금씩 적응해 갔다. 친정엄마의 약한 체력이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친정 아빠와 함께이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3개월의 출산휴가를 마치고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복직을 결정했다.
아이 돌보느라 엉망이 되었던 머리도 새로 하고, 복직 기념으로 옷도 몇 벌 장만했다. 잠이 늘 부족해 제대로 씻고 먹을 수도 없었던 나였으니 복직을 준비하는 내내 해방감조차 느껴졌다. 복직 준비를 하는 내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당시 친정인 춘천과 직장과 집이 있던 의정부는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였다. 그래서 주말에만 아이를 보러 가야 했다.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친정 부모님이 계시니 아이도 그리고 엄마인 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출산휴가 마지막 날 밤 아이를 재워 침대에 눕히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의정부 집으로 올라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집안을 가득 매운 적막함에 기분이 이상했다. 애써 마음을 누르고 침대에 누웠는데 아기나 너무 보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복직 전날 밤을 남편 품에 기대어 펑펑 울며 지새웠다.
그렇게 ‘주말 엄마’가 되어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친정에 내려갔다가 일요일 밤에 아이를 재워 놓고 올라오는 생활을 시작했다. 나와 남편이 내려가는 주말이면 친정엄마는 더 힘들어하셨다. 식사 준비로 분주했고, 올라오는 길에 챙겨줄 반찬까지 장만하시느라 쉴 틈이 없었으니 힘드실 만도 했다. 결국 친정엄마는 오른쪽 팔에 마비가 와서 거동할 수조차 없게 되셨는데, 그 사실을 나의 여름 방학일 까지 숨기고 계셨다. 전화통화 할 때 조금 아프다고 하셨던 팔이었는데, 아이를 안을 수도 없을 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안지도 못하는 녀석을 그냥 보내지 못하고 의정부 집까지 데려다 주신다며, 집안일 도와주시는 이모님 팔에 안고 의정부로 오셨다. 그러면서 엄마가 미안하다고 어찌나 눈물을 흘리시던지......마음 약하신 친정엄마는 방학 끝나고 춘천으로 데리고 오라시길래 알겠다고 말씀드리고는 꼭 안아 드렸다. 돌봐주지 못해 미안해 하는 친정엄마도 울고, 엄마를 힘들게 했던 내가 죄송스러워 나도 울었다. 그렇게 친정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아이를 품에 안았다. ‘주말 엄마’로 지낸지 6주 만에 나는 매일 매일 아이를 만날 수 있는 엄마가 되었다.
개학일이 다가오면서 걱정이 많아졌다. 친정엄마는 그 후로 팔 수술을 받으셔서 아이를 친정에 맡길 수 없었다. 결국 남편이 시어머니께 어렵게 부탁을 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하신 시어머니께서 아이를 돌봐주시게 되었다. 당시 퇴계원에 사셨던 어머니는 우리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고, 출퇴근 해주시면서 아이를 돌봐주셨다. 당시 중학교에서 근무했던 나는 육아시간을 사용해 3시 30분이면 퇴근을 할 수 있어서, 그나마 시어머니를 일찍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6개월을 보냈다.
다음해 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담임으로 야자라도 할라치면 아무리 일찍 와도 잠들어 있는 아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주말 엄마’ 시절을 생각하면 견딜만 했다. 잠든 아이 곁에 누워서 주먹진 손에 검지 손가락 하나를 넣어주면 녀석은 그 손가락을 꼭 잡고 잤다. 다행히 아침에는 방글방글 웃는 녀석에게 엄마 다녀온다고, 할머니랑 잘 놀고 있으라고 인사를 하고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도 잠시, 고등학교에 발령이 나고 퇴근이 늦어지면서 하루 종일 육아에 시달리던 시어머니께도 건강에 이상신호가 왔다. 그 후로는 신랑과 퇴근 시간을 조율해 가능한 일찍 퇴근해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급작스런 **암 진단으로 더이상 아이를 돌봐 주실 수 없게 되었다. 아이 돌봐주시느라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건강을 앗아갔다는 죄송스러움과 함께 아이를 온전히 돌봐야 하는 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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