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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만의 방 (주관적 글쓰기)
    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2. 8. 22:24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글을 써야 겠다

    나에게 이 중요해진 지점이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생각한다.

    어린 시절 경험했던 최초의 분노는 남자는 족보에 오르고 여자는 오르지 못하는 것이였다. 또 제사를 지낼때는 남자만 절을 하고 음식준비로 힘들었던 여자는 부엌에서 있는 것이였다.

     

    나는 ?” 라고 질문했고, 돌아온 답은 여자니까.....” 였다.

     

    아무도 납득할만한 설명을 하지 못한 그 사실을 인정하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명절이면 친척 언니오빠들과 놀생각에 한달음에 달려갔던 그곳을 가지 않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여학생은 가정과 가사를 배웠고, 남학생들은 기술을 배웠다. 교련시간에도 여학생은 보건교육을, 남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았다. 학창시절 내가 가장 싫어했던 교과목이 가정과 가사였다. 집에서도 해보지 않은 채썰기 깍뚝썰기를 학교에서 배웠다. 그 배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도 잘 알지 못했다.

     

    대학에 갔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나는 사범대에 진학을 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서가에서 저지당하지도 않았고, 잔디밭을 거닐며 사유할 수 있는 자유로움도 만끽했다. 공부가 재미있었고, 더 배우고 싶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 더 공부해서 대학 강당에서 강의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것을 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대학졸업과 함께 IMF가 찾아왔다. 외삼촌 빚보증이 문제가 되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경매로 넘어가는 집, 연일 울음 바다의 엄마, 먼 곳으로 강제전출 가신 것으로도 모자라 월급 차압까지 당한 아빠, 취업 재수중인 오빠, 그런 상황에서 대학원 진학은 사치였다. 결국 대학원 진학은 마음을 접었다. 그리고 대학 내내 열심히 노력하고 준비해 임용고시를 합격했다. 졸업과 동시에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어린시절부터 바라던 꿈이었으니 교사로서의 생활도 즐거웠다. 처음이라 좌충우돌 힘들긴 했지만 아이들도 예뻤고, 가르치는 일도 좋았다. 결혼 전 교사생활을 하면서는 여성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던 기억은 없었다.

     

    그런 내가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결혼 준비할 때 당당한 시댁과 괜히 머리를 조아리는 친정, 명절에 반드시 먼저 가야하는 시댁과 나중에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친정, 내면의 욕구와 상충하는 충동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내 편이 되어 주겠다던 신랑도, 내 편일줄 알았던 엄마도 어쩌지 못했다.

     

    결혼 5년 만에 한 아이 엄마가 되었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도움을 받을때까지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그래도 괜찮았다. 그러나 두분의 건강 악화로 육아의 책임이 온전히 주어지면서 내면과 상충하는 충동들이 널뛰기를 했다. 아이는 예뻤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책임이 당연히 엄마에게만 주어지는 상황에 화가 났다. 그렇게 내 가슴속이 분노로 차오를때 아이 곁에 머물수 있도록 도운 것은 신랑이었다. 신랑은 엄마인 나보다 아이에게 더욱 스스로를 헌신했다. 엄마 없이 보낸 어린시절이 평생 가슴에 사무치는 기억으로 남은 그의 속내를 이해하고서야, 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아이 곁에 머물렀다.

     

    아이와 함께하는 첫 번째 휴직 기간... 아이는 더없이 예뻤지만, 나의 내면은 불안하고 억울한 감정이 끊이질 않았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사회적으로 뒤처지는 느낌도 싫었고, 두려움을 느끼는 나도 싫었다. 결국 나는 경력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1년 이후 서둘러 복직을 했다. 그때가 아이 28개월 무렵이었다. 아이가 어떤 마음이고 무엇이 필요할지 가늠하지 못한 상태로 복직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이번엔 아이가 문제였다. 녀석은 출근준비 하느라 머리감고 있는 욕실 앞에 와서 안아달라고 울었고, 머리감고 있는 엄마도 울었고, 뒤에서 아이를 안아주려 해도 안기지 않는 아빠도 울었다. 그렇게 우는 녀석을 가까스로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출근을 했다. 출근해서도 마음 편할날이 없었다. 아이 때문에 지각, 조퇴를 자주 할수밖에 없었고, 업무처리에 있어서도 시간적 제약이 많았다. 그래도 아이 때문에 업무 처리 제대로 못한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었다.

     

    일도 육아도 잘 해내고 싶었는데, 두가지 모두 엉망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신랑도 육아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주양육자는 언제나 엄마였다. 버거웠고, 힘들었고, 아팠고, 그래서 참 많이 울었던 시간들이었다.

     

    일과 육아만으로도 버거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사람은 친정엄마였다. IMF 이후 얻은 우울증으로 엄마는 연일 내 가슴을 졸이게 했다. 예측할 수 없는 감정상태, 폭음 후의 건강악화, 입원과 수술을 반복했다. 거기에 아빠의 급작스런 쓰러짐까지.....부모님의 병원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오빠가 아니라 나였다. 그리고는 친정엄마는 온갖 감정들을 토사물을 토해내듯 뱉어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기대고 위로받고 싶었던 엄마였는데, 내가 가장 힘든 순간에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당시의 나는 절박했다.

     

    그 절박함이 하늘을 찌를 때, 더 이상은 나의 내면의 충동과 분노를 어쩌지 못할 때면 꼭 아이는 보챘다. 두 팔 벌려 온갖 짜증을 쏟아내곤 했다. 그날도 아마 그런 날들중 하나였을테고, 나는 녀석에게 나의 모든 분노를 퍼부었다. 신랑이 아이 먼저 진정시키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럴 수 없는 내가 아팠고, 그러지 못한 엄마라 미안했다. 그날 밤 울다지쳐 잠든 아이 머리맡에서 참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때가 아이 5살 겨울이었다.

    감정의 하수구로서의 역할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내가, 녀석에게 그대로 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사랑도 재대로 주지 못한 엄마가 상처까지 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그 뒤로 다시는 나의 분노와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 붓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이가 커가니 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직장맘 아이라 정보가 부족할까 싶어 방학이면 열심히 검색하고 스케줄을 짰다. 그러나 영어가 문제였다. 이리 저리 고민하다 어린이집 영어 선생님과 상담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아이를 엄마보다 더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이 나에게는 전환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온전히 사랑해주지도 못한 채 퍼붓기만 했던 아이가 가여웠고,

    엄마와의 시간과 사랑을 주어야 할 나이에 가르치려고만 했던 엄마여서 미안했다.

    아이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행복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직장생활 착실히 잘해서 적당한 나이가 되면 관리자로 승진하면 행복할까?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직장생활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고, 결국 지금보다도 아이와의 시간을 더 줄여야 했다. 그러면 아이는 행복할까? 지금도 퇴근후엔 엄마옆에 꼭 붙어 있어도 늘 목말라 하는 녀석인데 행복하지 않은 눈빛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의 친정어머니처럼 아이의 행복만을 위해 내 삶을 평생 내어줄 수 있을까? 그리고 내어준 삶을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망한 그 마음을 아이에게 쏟아내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잘 다져나갈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내안에 품기 시작하면서, 나는 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 누구를 위해 쓰고 싶은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졌고 명확해졌다. 나와 내가 아닌것, 진실과 거짓, 본질과 허구, 삶과 사랑, 행복과 불행, 빛과 어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그것들을 나는 글을 쓰면서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를 간절히 기다려온 아이에게 돌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201331, 나는 다시 아이 곁으로 돌아왔고 10살이 된 2017, 아이의 곁을 오롯이 지키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이 곁을 지킬 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놀이밥 마중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아이를 돌보느라 분주했지만, 커가면서는 노는 녀석들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마중을 했다. 처음엔 그 시간이 참 무료했다. 그렇다고 독서를 하기엔 집중이 잘 안되었다. 그러다 문득 아이의 노는 모습을 기록해 두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놀이밥 기록에 엄마의 사색이 더해지면서 아이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아이 곁에 머물며 베드타임 스토리를 다시 시작했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며 아이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더 여렸고, 어른들의 부당한 처사를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랑받기 위해 스스로를 감출 수 있는 존재였다. 너무 여린 녀석이 온전히 커가도록 마음을 쓰는 시간을 오롯이 보내고 나니, 내재된 나의 여성적 감수성의 촉이 되살아 난 느낌이 든다. 엄마가 되어 살아왔던 시간은 나에게 억누른 나의 감수성을 되살아나게 해주었다. 세상과 싸우느라 숨죽였던 나의 여성성이 마음껏 꽃피었던 시간이었다.

     

    지금 나는 300파운드의 돈은 없지만, ‘자기만의 방은 있다.

    그렇지만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사물을 직시하는 예술적 경지의 픽션을 쓰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아직도 내면의 감정을 억제하고 비교하느라 애를 쓰곤 한다. 그렇게 가슴을 끓인 날은 분노의 글들이 토사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렇지만 아이의 놀이밥 마중을 하고, 베드타임 스토리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는 다시 리얼리티에 한발짝 다가선다. 그렇게 나는 나 자신과 나 자신이 아닌 것들 사이에서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내년에 복직을 할 것이고 300파운드의 돈은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 지적 자유를 위한 돈이 될지, 다른 무엇이 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쩌면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는 시간을 빼앗긴 댓가로 받게 되는 돈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에겐 가장 딜레마이자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나는 글쓰는 엄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소중한 생명을 이 세상에 내어 놓는 고귀한 존재인 엄마들이 스스로의 삶을 당당히 주장하고, 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언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전적으로 바람직한 아이들의 시간을 온전히 함께 보낸 경험은 내재된 섬세한 감수성을 더욱 환하게 꽃피우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아이들의 시간이 주어지거든 그 시간을 자신이 전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도록 준비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가득찬 예술이 나올때, 예술성이 더욱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삶이 그저 표면만 스친 것이 아니라 심연 저 밑바닥까지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도록, 그래서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자기 자신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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