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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비극 읽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0. 15. 23:56
만물이 결실을 맺는 10월이다.
불볕 더위에서 고사하지 않은, 강하게 불어 닥치는 비바람에도 굳건히 생명을 지켜낸, 만물이 결실을 맺는 10월이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10월에 나는 태어났다. 그 풍요의 들녘에 펼쳐진 수많은 결실들 속에서 풍요의 이면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어른이 된 이후였다. 풍요의 상징인 가을의 들녘이 낙엽이 휘날리는 쓸쓸한 계절에 대해 노래로 가득차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까......
우리네 삶도 그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너무나 자주 주고 받지만, 정작 우리네 삶속에 ‘행복한 순간’은 풍요로운 가을 들녘만큼이나 찰나의 순간이다. 풍요의 달콤함을 채 맛보기도 전에 쓸쓸함을 안겨주고 홀연히 떠나가기 일쑤다. 그런 우리들의 쓰린 가슴을 행복으로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 자리를 비극이 채울 수 있을까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풍요와 쓸쓸함을 함께 머금은 10월, 내가 태어난 달이기도 한 10월,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아야 할 10월, 나는 그리스 비극을 읽었다. 거기에 더하여 가장 인상 깊고 기억에 남는 비극 한편을 골라 자신의 삶과 연결하는 글쓰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글이 잘 읽히지 않았다. 비극이 내게 주는 깊은 슬픔에 동요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글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조금씩 읽었다. 일상의 가장 행복한 순간(아이와 잠자리에서 뒹굴 때, 피로한 팔다리를 안마해주는 남편이 안마를 해줄 때)을 피해, 내 삶의 비극과 마주할 용기가 내 안에 장착되어 있을 때, 그때가 되어서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6편의 비극을 읽었다.
딸아이를 재물로 바친 대가로 처절히 죽어가야 했던 아가멤논, 인간을 편들다 심연으로 가라 앉게 된 결박된 프로메테우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살을 섞은 기구한 운명의 오이디푸스왕, 조국을 배신한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명한 크레온과 그의 명령을 어긴 안티고네의 죽음, 그녀를 사랑한 크레온의 아들과 아들을 잃은 아내의 죽음까지......어느 것 하나 눈물을 쏟지 않을만한 슬픔이 없다.
그런 나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비극은 『메데이아』였다. 남편 이아손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메데이아, 이아손의 배신 앞에서 엄청난 복수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모습, 『메데이아』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등장인물은 ‘메데이아의 두 아들’이었다. 아버지 이아손의 야심과 어머니 메데이아의 복수심 사이에서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사라져간 두 아이의 가련한 삶이 가여워 가슴 깊이 먹먹함이 느껴졌다.
내 안에 존재했던 이아손의 야심, 나는 그 야심 때문에 아이의 어린 시절을 제대로 돌봐주지 못했다. 나의 야심을 뺏어 가려는 사회를 원망했고, 돕지 않는다고 오해했던 남편을 미워했다. 사회와 남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커져갈수록, 아이를 힘들게 했던 엄마였다. 온갖 부정적 감정의 찌꺼기들이 분노로 가득 차던 어느 날, 나는 복수의 칼날을 갈던 메데이아로 빙의한 것처럼 사납게 표효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에게 모질게 굴었다.
언어의 칼날을 휘두르며 아이에게 퍼부었고, 그렇게 나는 녀석에게 ‘가장 슬픈 날’을 남겨주었다. 가장 사랑해주고 싶었던 녀석을 가장 아프게 했던 그날이, 내겐 영원히 기억될 ‘가장 비극적인 날’이 되었다.
그 날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기 위해 나는 그 회한을 늘 떠올리며 살아간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이지만, 여전히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아이를 더욱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해주었음을 너무도 잘 안다.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세상과 싸우기 위해,
다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자‘
그날의 비극이 내게 주었던 가르침이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다는 아이스퀼로스의 이야기는 진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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