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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뷰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0. 30. 21:33
MANSPLAIN / 『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책을 읽기 전 제목을 소리 내어 여러 번 읽어 보았다.
가르치려 든다, 가르치려 든다, 가르치려 든다..........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당시의 나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 7살 즈음이었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그네를 타며 놀고 있는 나에게 지나가던 언니, 오빠들이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놀이터 저 멀리 보이는 우리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파란 지붕집‘이 우리 집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그곳이 우리 집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부족했고,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결국 나는 그들 손에 이끌려 동네 파출소에 미아로 신고 되었다. 열린 문 밖으로 나를 데리러 올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파출소로 나를 데리러 엄마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가르치려 든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조차도 타인에 의해 부정되는 것, 결국 스스로 알고 있는 것조차도 의심하게 되는 것, 철저한 자기 불신으로 결국은 침묵하게 되는 것...... 당시의 나는 나의 앎에 대해, 존재에 대해 항변하기에는 너무 어렸다고 생각했다.
미숙했던 유년시절이 지나가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배움의 과정은 즐거웠고 잘해내고 싶었다. 열심히 노력한 만큼 성과를 얻었고 인정도 받았다. 내 존재가 마음껏 드러나도 좋은 날들이었다. 그랬던 내게 세상이 다시 ’가르치려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족보를 펼쳐두고 이야기 나누는 남자 어른들, 부엌을 서성거리며 아침 차례상에 올릴 음식들을 손보는 여자 어른들, 깊은밤 곤히 잠든 아이들, 설잠이 들었던 내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들.......
족보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 하나 호명되었다. 아버지의 형제들과 아들들, 아들이 없는 작은 아버지의 한숨, 아들을 둔 다른 형제들의 위로, 출산을 앞둔 막내 작은 아버지의 아들 녀석 이름을 짓기 위해 둘러앉은 아버지의 형제들은 돌림자를 넣어 자랑스럽게 이름 하나를 지어 내었다. 어린 마음에 귀기울여 들어보았지만 다시 잠들때까지 내 이름은 들을 수 없었다.
왜 내 이름은 들리지 않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나는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는 족보에 오를 수 없다‘며 가르치려 들었던 어른들... 그렇게 나는 존재하는 동시에 말소되는 두 번째 경험을 치뤘다. 나를 설명할 논리와 언어가 부족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나는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졌다. ’족보‘ 이야기를 듣게 된 이후, 명절이면 나는 큰댁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것이 내 존재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내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그 고민 끝에 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부밖에 없었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했고, 내가 꿈꾸는 ’무엇‘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원하는 ’무엇(교사)‘이 되었다. 이제는 내 존재를 지켜낼 수 있을꺼라 믿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했고 결혼을 앞둔 나로서는 세상의 논리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혼을 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된 내 안의 불만들, 결혼 후의 명절 문화, 아이 출산 후의 양육의 부담, 출산 이후 위태로워진 내 존재감, 내안의 불안이 가득 차올라 나를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 왔다.
존재를 부정 당하지 않기 위해 세상과 다투느라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아이의 눈물가득한 눈망울이 내 안에 들어왔다. 아이의 눈물을 마주보지 못했더라면, 나는 아마도 나의 슬픔과 분노에 매몰되어 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내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아이에게 매달렸다. 딸 아이가 나와 같은 고통을 경험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더 높은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 교육에 더 열성을 다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가르치려 들었던 엄마였다.
아이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왔던 엄마라 생각했는데, 행복해 보이지 않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잘 알지 못했다. 더 이상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알지 못할때가 되어서야 나는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알지 못했던 나에게 리베카 솔닛이 기꺼이 손 내밀어 주었다.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어가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결국 다 읽지 못했다. 다시 들춰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두 번째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손에 들었다.
침묵을 강요하는 여러 단계들을 읽으며 아픈 과거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라 나를 콕콕 찔러댔다. 성희롱, 성폭행을 당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침묵을 강요하는 여러 단계들 역시나 리베카 솔닛의 통찰은 날카로웠다. 직접적 성희롱과 성폭력의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가슴이 아팠지만 견딜만 했고, 덕분에 책장이 하나 둘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을 읽어 나갔다. 읽어나가면서 슬픔과 분노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선물 받았다.
123> 사람들은 대부분 어둠을 두려워한다. 아이들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캄캄한 것을 두려워하고, 어른들의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이라는 어둠을 겁낸다. 그러나 무언가를 구별하고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 ...... 우리는 모르는 것의 어둠, 희미하게만 보이는 공간을 겁낸 나머지 종종 감은 눈의 어둠, 자각하지 못함의 어둠을 선택한다. 곤잘러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바, 사람들은 그 어떤 정보라도 자기 머릿속 모형에 대한 확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타고난 낙천주의자들이다. 자신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 게 낙천주의라면 말이다. 그리고 계획의 영향 아래에서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쉬운 법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것, 선입견은 놓아두고 가볍게 여행하는 것, 눈을 활짝 뜨고 어둠으로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작가들과 탐험가들이 할 일이다.
그동안의 나는 슬픔과 분노가 무엇 때문인지 어렴풋이 알면서도 정작 그것을 깊이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아에게 그녀는 내가 모르는 것, 못 보는 것, 모호한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존재하되 삭제되고 제거되어 사라져간 수많은 삶들을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의 생명권, 자유권, 문화와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위한 그녀의 노력은 존중받지 못한 수많은 약자들을 지칭하는 통칭어로 확대되어 가는 과정을 읽으며 깊은 감동이 번져왔다.
나는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통해 그녀에게 배웠다.
자신의 슬픔을 깊이 대면한 경험은 아프지만, 더 많은 영혼과 만나게 해 준다는 것, 그 만남은 더 많은 것을 보게 하고, 더 많은 생명을 피어나게 하고, 존재의 의미를 일깨워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내게 온 ’아픔의 순간‘을 기쁘게 맞이해야겠다. 아픔이 나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가슴 깊이 느끼며 걸어가 보자. 뒤돌아서거나 외면하지 말고 그렇게 걸어가 보자. 아픔을 감당하고 모호함을 견디며 그렇게 앞으로 걸어 나가자. 나의 걸음이 모든 폭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타인의 해방을 위한 작은 초석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믿자. 리베카 솔닛이 그랬던 것처럼, 울프가 그랬던 것처럼......
149> 지금으로서 그녀는 다른 누구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혼자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자주 필요하다고 느끼는 일이엇다. 생각하는 것,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조용히 있는 것, 혼자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는 모든 확장하고 반짝거리고 소리내는 것들은 증발했다. 그녀는 자못 엄숙한 기분을 느끼며 자기 자신으로 쪼그라들었다. 쐐기 모양을 한 어둠의 핵으로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줄어들었다. 그녀는 계속 뜨개질을 했고, 계속 꼿꼿하게 앉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 자기 자신을 느꼈으며, 거치적거리는 것들을 모두 떨어낸 자아는 더 없이 기묘한 모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삶이 일순간 그렇게 가라앉을 때 경험의 폭은 무한해지는 것 같았다. 그 아래는 온통 캄캄하고 온통 퍼져나가고, 헤아릴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우리는 간간이 수면으로 올라온다. 사람들은 그 모습으로 우리를 본다. 그녀이 수평선은 그녀의 문한인 것 같았다.
울프는 우리에게 무한을 주었다. 그것은 움켜쥘 수 없는 것. 어서 껴안아야 하는 것, 물처럼 유동하는 것, 욕망처럼 가없는 것, 길을 잃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나침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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