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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그림책 작가 ( 주관적 글쓰기 )나로 선다는 것/책이야기 2020. 12. 3. 23:53
< 글 선생님의 과제 >
열명의 작가중 제일 마음에 드는 작가 한,두 분을 골라 그 이유를 써볼까 합니다.
(열 분의 작가가 모두 매력적이라 한 두명을 고르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유독 마음에 남는 작가를 찾아보시지요.)
아이의 어린시절 어른들이 곧잘 던졌던 질문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 질문에 깜찍한 딸아이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런 곤란한 질문은 하지 마세요.”
지금의 내 마음이 꼭 그렇다. 10명의 작가 중 한두 명을 골라 이유를 적어보자는 금주의 과제를 부여받으니 선택하지 못한 그림책 작가에게 괜스레 미안해진다. 글을 쓰는 일보다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어려웠던 한주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 여겨진다. 그래도 선생님 말씀대로 유독 마음에 남는 작가를 찾아보자.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도 여운이 많이 남는 작가는 누구일까? 나의 일상을 파고들어 마음을 뒤흔들고 있는 그녀(그)는 누구일까?
그렇게 해서 나는 <자기 믿음> 에 대해 이야기 한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를 만났다.
8살부터 스스로를 작가가 될 거라 생각했던 당차고 귀여웠던 그녀,
단 한 번도 다른 자신이 되어보겠다고 꿈꾸지 않았던 그녀,
자신도 놀란 그녀의 꿈을 향한 여정을 지켜보는 내내 부러움이 가득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왜 글 쓰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어느 누구도 나에게 넘어오지 말라고 금을 그어 놓은 것도 아닌데, 난 그랬다. 금이 그어진 저쪽 세상이 어떤 곳인지 그저 막연히 동경하고 그리워하며 그렇게 40여년을 보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마음속에는 글 쓰는 삶보다 더 소망했던 일(가르치는 일)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보다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그 소망이 내 것이 아니란 의심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가 꿈꾸었던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비록 글 쓰는 일과 멀어지는 일이었지만 내 마음은 간절함이 더한 쪽을 따랐을 게다.
그렇게 나는 노력했고, 그 노력으로 꿈을 이루었다. 나는 아이들을 만나고 가르치는 일을 사랑했다. 나의 도움으로 조금씩 성장해가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이 일이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나도 조금씩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다른 자신이 되어보겠다고 꿈꾸어 보지 않았던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처럼 나 역시 그랬다. 나는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단 한 번도 꿈꾸어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랬던 내가, 열정을 다해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내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내 삶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들려오면서 부터였다.
조금 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을 배반하는 일이라면, 나의 안위를 위해 아이들을 져버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아이 엄마가 되면서 위기가 있었다.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아이가 일터와 가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하지만 그 힘든 순간들을 견디게 해주었던 것은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었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 나에게 내려진 성과상여 ‘B등급'은 충격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는 <교사 평가제>에 환멸을 느꼈다. 1998년 이후 내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사랑과 헌신의 순간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결국 헌신하다 헌신짝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난 학교를 떠났다. 그로부터 1년의 교사 연수년 휴직, 2년의 육아휴직, 1년의 자율 연수 휴직으로 4년을 학교밖에 머물렀다.
떠나올 당시만 해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왔던 교육적 헌신의 가치와 의미를 져버린 그곳과 세상에 대한 분노가 나 자신을 들끓게 했다. 그 들끓음은 결국 다른 내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꾸게 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어린 시절 금 그어 놓았던 ‘글쓰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꿈(작가)을 향한 여정이 시작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었던 글쓰기였다. 그러나 그저 좋아하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은 달랐다. 나는 써야하는 이유조차 품지 못한 사람이었으니까.....
글 쓰는 사람을 꿈꾸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질문이 많아졌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글을 쓰고자 하는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그 질문에 답하며 지금까지 왔고, 그 여정에 베아트리체를 만났다. 한 번도 다른 내가 되어보기를 꿈꾸지 못했다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와 해후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내가 묻고 답한다.
“과거의 너는 어땠니? 행복했니?”
“응. 행복했어. 어린시절부터 꿈꿔왔던 일이니까. 지금의 너는 행복하니?”
“응. 행복해. 이 또한 동경해왔던 일이니까. 그리고 직접 해보니까 점점 더 좋아져.”
“그럼 미래의 너는 어떤 사람이 될래?”
“나는 행복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에게서 찾는다.
p 303> 자기 자리를 찾아 가는 것, 꿈을 이뤄가는 것은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같아요. 작은 단계들을 하나하나 끈기 있게 거치면 어느새 크게 불어나 있지요.
행복에 대해 말하는 창작물을 짓고 싶다면 우선 자신의 행복했던 느낌을 떠올려 그걸 전달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창의성은 자기를 믿는 것입니다. 창의성이 최초로 태어나는 순간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할 때입니다. 그 느낌과 생각, 충동, 자기 안의 목소리를 믿고 그리로 자신을 던지는 것. 저에겐 그것이 창의성입니다. 자기 믿음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불가능해요.
나의 행복의 느낌을 떠올린다.
나는 나보다 약한 존재의 성장을 도울 때 행복을 느낀다. 그들의 성장은 그동안의 수고로움도 잊게 할 만큼 몇 갑절의 기쁨을 준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유약하다. 스스로에게 허락된 시간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부족하다. 그 답답한 녀석들의 마음을 곁에서 바라보고 공감해 주고 믿어주고 지지해 주고 싶다. 그럴 때 아이들이 얼마나 찬란한 꽃을 피우게 되는지, 그 꽃이 얼마나 예쁜지, 그들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다. 그 도움의 길에 ‘글’이 함께 한다면 더 없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그곳 이었는데, 그리움 가득한 곳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내가 써야만 하고,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찾은 느낌이다. 어린시절 부터 꿈 꿔온 일터에서 내가 좋아하고 잘하고 싶은 글을 쓰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무엇을 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 나는 약한 그들을 위한 글을 쓰고 싶다. 교사의 언어, 엄마의 언어가 아닌, 그들만의 언어를 찾는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로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만나 눈사람이 된 기분이다. 그러나 이제 막 눈덩이 얹어놓은 눈사람이 녹아버릴까 두렵다.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확신’이다.
복직 이후 ‘B등급 교사’로 또 다시 전락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S등급 교사’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배반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다. 이를 위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제도의 문제이지 내 자신의 문제는 아니라는 ‘자기 확신’이 절실하다.
부족한 문장력도 나를 작아지게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글을 쓰는 이유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한 일이고, 그 일이 타인(약자)의 삶을 돕는 일이라는 ’자기확신‘이 있다면 문제 없다.
299> 예전엔 부족함을 어떻게 채울까에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단점이 관점에 따라선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한 가지 면에 미흡해도 다른 면에선 충분할 수 있고, 우리 안에 이미 충분한 가능성과 힘이 있다는 메시지를 책에서 전하고 싶어요. 다른 누군가가 되려 하지 않고 비로소 저 자신으로, 제 자리에서 온전히 행복한 사람이 된 지금의 제 경험담을 담아서요.
그녀의 그림책들을 곁에 두고 흔들리는 내가 될 때마다, 포기하는 내가 될 때마다 꺼내어 읽어야 겠다. 그래서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내 안에 이미 충분한 가능성과 힘이 있다’는 메시지의 감동에 흠뻑 젖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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